Crusader by Chris de Burgh
1984년 4월. 계절의 변화로 보자면 아마도 지금 이 즈음이지 싶습니다. 저에게 있어 그 시기는 학교 앞 다방에서(그때는 음악다방이라는 것이 아주 흔하던 시기였지요) 음악에 미쳐서 살던 때였습니다. 혼자서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운 아주 좁은 공간에서 이 음반 저 음반을 뒤적거리면서(당연히 검은 LP판입니다. CD가 보급되기 직전이었습니다) 평소처럼 내가 듣고 싶은 곡들을 위주로 들으면서 간간히 사람들이 신청해 오는 노래들을 실 없는 농담을 섞어가며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아가씨가 메모지를 음악실 안으로 쓱 밀어 넣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그 메모지를 열어 보았습니다. Chris De Burgh. 가수는 알고 있었지만 신청한 그 노래는 제가 모르던 노래였습니다.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 – Chris De Burgh. 사월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라…… 나는 즉시 그 노래를 찾아서 턴 테이블 위에 걸었고 독특한 목소리의 색과 멜로디의 흐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를 한 곡씩 한 곡씩 모두 들어보게 되었고 마침내는 이 음반의 수록곡 모두를 한 곡도 빠짐없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노래를 신청했던 아가씨는 저의 wife가 되어있으니 저로서는 참으로 대단한 사연을 간직한 음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CD를 걸면 나오는 Carry on부터 시작해서 앞서 소개한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 장엄한 분위기의 Just in time 과 Old Fashioned people, 작고 귀여운 느낌의 Quiet moments,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역시 작고 귀여운 곡인 You and me 에 이르기까지 한 곡도 놓칠 수 없는 곡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손 꼽히는 수작을 고르라면 아마도 앨범의 동명 타이틀인 Crusader 가 아닌가 싶습니다.
Crusader는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지금 현재 모습을 대비하는 가사를 통해서 Chris de Burgh의 세계관과 종교관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전쟁의 참상이 끊일 날이 없었던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일생 일대의 사건. 그것은 바로 사라센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강력한 외부의 적이 생겨나자 유럽은 마침내 서로 간의 전쟁을 멈추고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연합군을 구성합니다. 주로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와 독일로 구성된 그 연합군의 이름이 바로 십자군(Crusader)입니다. 노래 가사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매일매일 술과 장미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사라센의 왕에게 어느 날 척후병이 돌아와서 기독교인들이 연합군을 구성해서 여기로 쳐 들어 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사라센의 왕은 “The Christians could never unite! I am invincible, I am the King, I am invincible, and I will win…” 이라고 하며 그 척후병을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민심을 흐리게 한다는 죄목으로 처형해 버립니다. 그리고 몇 일 뒤 그는 예루살렘을 내어 놓고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결국 노래의 마지막에 가서는 당시 대의를 위해서 힘을 합치던 그 정신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하면서 지금 현재 이 시대에는 사악한 개인의 탐욕만이 판을 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노래를 마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사실상 예루살렘은(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때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서 모였던 그 고귀한 정신은) 잃어 버렸다고 노래를 끝마치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좋아하지만,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가사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이 가사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비롯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 마지막 기독교 전초 기지가 함락 당 할 때까지 근 200년간 모두 8차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제 1차 십자군 원정 때(1099년) 탈환하였습니다. 그 이후 이어진 십자군 전쟁은 성지 회복이라는 고귀한 정신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오로지 서양의 탐욕스런 정복자들의 모습만 남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바로 서양의 식민 역사가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모든 십자군 전쟁은, 제6차 십자군 전쟁을(그나마도 전쟁이 아니라 외교의 힘으로 굴복시킨 것이었습니다)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특히 제3차 십자군의 위용은 대단했는데,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프랑스의 존엄 왕 필립, 잉글랜드의 사자 왕 리차드라는 당대의 영웅들이 모여서 결성된 막강한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던가요. 너무나 개성이 강하고 또한 내부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는 야심으로 모인 이들이었기에 그들의 분열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이 어쨌든 이 곡은
1. The fall of Jerusalem
2. In the court of Saladin
3. The Battlefield
4. Finale
의 4부로 편성된, 대중음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 장대한 스케일과 함께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입니다.
모든 곡들을 작곡하고 노래한 Chris De Burgh 는 아르헨티나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국적 환경에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기타를 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전문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으며 우수에 젖은 음색을 가지고 있어서 그 목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 앨범에 수록 된 곡은 아니지만 영화 종합병원의 OST로 삽입된 Natasha Dance 라는 곡도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꽃 피는 춘삼월이 돌아왔는데도 아직 짝이 없어서 고민하시는 분들은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를 들으면서 사월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빨리 찾으시기 바랍니다.